기막힌 인연(2010.12.26)
기막힌 인연(2010.12.26)
세월 참 빠르다.
내년이면 내가 천직을 맡은 지가 20년이 되는 해이다.
얼굴과 눈가에 잔주름도 많이 늘었고 머리는 이미 반백이다.
젊은 혈기로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다는 욕망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나를 본다.
살아갈수록 힘이 부치기 때문인가?
자꾸만 가라앉는 내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떠날 시간을 헤아려본다.
시간을 20년 전으로 돌려보자.
참으로 지긋지긋했던 철도청 생활은 1990. 5. 8일자로 사표가 수리되었다.
만 6년 4개월의 근무를 하였지만 나에게 돌아온 것 480만원의 퇴직금과 13만원의 상환금이었다.
의무적으로 7년을 근무해야 상환금을 내지 않는데 미 근무기간 8개월이 남아있기에 그에 해당하는 상환금을 낸 것이다.
고등학교 입학 당시 찌든 가난으로 인문계 고등학교를 갈 수 없었다.
그래서 학비가 공짜인 국비인 철도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이다.
전교 석차 10% 이상 되는 성적이 되어야 입학자격을 얻었지만 지원한 학생들간 다시
경쟁을 해야 했다.
4:1의 비율을 물리치고 입학한 것이 철도고등학교 토목과였다.
졸업만 하면 만사가 풀릴 것이란 기대는 발령 첫날부터 막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기술원 자리가 있어야 현장 근무를 하지 않는데 TO가 없다보니 현장에 배치 받아 근무하게
되었다.
그 현장이 다름 아닌 철길을 고치는 선로반이다.
중간에 보선반으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그 곳에서 만 5년의 현장 생활을 했다.
작은 체구인 나로서는 그 현장이 지옥 같았다.
더 이상 현장에 적응하기가 힘들어 90년 5월에 당당히 사표를 낸 것이다.
사표를 낼 때 마지막 근무지가 가은 보선반이었다.
어머니는 여기 고향서 자리 잡고 결혼하라면서 극구 반대를 하셨지만 이미 결심한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나와 보니 나를 반겨주는 기업은 없었다.
모든 기업체들은 대졸을 원했기에 내가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학력제한 없는 공무원에 다시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그럼 9급으로 다시 들어갈 것인가? 아님 7급에 도전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지만 큰 포부를
가지고 7급 행정직에 응시하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부산 동래선로반에서 3년 근무하면서 서면에 있는 고시학원에 다녔기에 혼자 공부할
정도의 실력은 되어 있었다.
과목은 국어, 영어, 국사, 헌법, 행정법, 행정학, 경제학, 전산학개론 총 8과목 이었다.
이중에 나를 제일 고생 시킨 과목이 영어와 경제학이었다.
영어는 고등학교 나온 실력이 전부인지라 단어, 문법, 독해 어느 하나 받쳐주는 것이 없었다.
또 경제학도 대학 나온 사람도 어려워 지방행정을 선택하는데 나는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었기에 지방행정으로 바꿀 시간이 없었다.
영어와 경제학은 거의 매일 하다시피 했다.
드디어 원서를 우편으로 경북도청에 제출했다.
그런데 수험번호표를 교부 받으니 이게 웬걸 수험번호가 999번이다.
수험번호를 받고 난 뒤 첫 느낌
‘이거 한 껏이 부족해서 떨어지는 것 아닌가’
불안한 감정을 떨치고 이제는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사표를 내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1년뿐이었다.
여기서 사생결단을 내야 되지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서 더 이상 공부하는 것은 사치라 생각했다.
매일 아침 7시 40분 점촌 나오는 버스를 타고 함창 형설 독서실 도착하면 8시 20분이었다.
그 때부터 공부를 하면서 독서실에서 점심, 저녁을 먹으면서 공부를 계속 했다.
다음 날 아침 7시 차를 타고 농암 집에 들어가면 7시 30분, 부리나케 10분 만에 밥을 먹고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 2개를 가지고 다시 7시 40분 버스를 타고 나와 쳇바퀴 돌 듯 공부를
하였다.
그러기를 5개월 드디어 시험을 치게 된 것이다.
시험을 치고 나왔지만 경쟁률이 40:1이 되니 합격을 장담할 수 없었다.
왜냐면 나는 정규 교육도 못 받았고 또 군 가산점에서 부족하기 때문이다.
보충역을 나왔기에 5점을 받는 남들보다 2점을 더 많이 맞아야 합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합격자 발표가 나는 날
전화를 거니 하루가 연기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오늘 발표 나는 줄 알고 있었기에 어머니한테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혹시나 내일 발표 나는 날 정말로 떨어지면 어쩌나싶어 떨어졌다고 이야기 했다.
그 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지만 아들 실망하는 것이 두려워 내색을 않으셨다.
드디어 5.31일! 연기되었던 합격자 발표가 나는 날이다.
농암 장날이라 옷을 리어카에 실어 놓고 밥상머리에서 어머니께 물었다.
“엄마! 어제 밤에 무슨 꿈 꿨어요?”
어머니의 꿈은 신기할 정도로 잘 맞았기에 물어본 것이다.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애기가 똥을 싸서 냇가에 가서 씻는 꿈을 꾸었는데.....뭔 일이
있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어머니는 내가 전날 떨어졌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꿈 해몽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꿈속에서 보는 어린아이는 근심거리라 했다.
애가 똥을 싸서 물에 가서 씻어내는 것은 근심을 씻어내는 것이라 해몽이 되었다.
농암 장에 가서 옷 보따리를 풀어 걸어 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9시가 좀 넘어선 시간 경북도청으로 전화를 걸었다.
“합격자 알아보려고 하는데요. 수험번호가 999번입니다.”
“아하! 합격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그 소리를 듣고 한 없이 기쁘고 날아갈 듯 했다.
눈에는 눈물이 솟고 가슴은 마구 뛰고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쳤다.
부리나케 시장으로 자전거를 타고 올라갔다.
옷을 팔고 있는 어머니께 “엄마! 나 됐어. 나 됐어” 말하니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어제 내가 시험 떨어졌다고 이야기 해놓았으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당연했다.
“아니! 뭐가 됐다고?”
“엄마! 나 시험 됐어. 시험 됐다고”
그제야 어머니는 알아차리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난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공들인 것을 잊지 못한다.
매일 아침 도시락 조달과 혹 공부하는 내 마음이 불편할까 많이 살펴셨다.
또 내가 시험 꼭 합격하도록 새벽 일찍 봉암사에 자주 가셨다.
대초에 불을 붙이며 빌었다고 했다.
우리 아들 이번 시험에 꼭 합격하도록 도와 달라고
그러면 우리 아들 봉암사에 들러 인사 시키겠노라고 하면서.......
그렇게 시험에 합격하고 난 뒤 점촌시청에 발령받아 근무를 하였고 95년 시군 통합으로
문경시가 되면서 현재 근무지가 되었다.
그러든 어느 날
무심코 관광지도를 보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봉암사 뒤편에 있는 산이 희양산이다.
화강암으로 밝은 빛을 내는 삼각형의 웅장한 산
그 산의 높이를 보고 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산의 높이가 “999m”로 되어 있었다.
그 순간 난 멍한 기분에 알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무엇인가?
우연의 일치 치고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내 수험번호가 “999”, 희양산 높이가 “999”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참으로 묘한 인연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이런 인연이 맺어지게 된 것은 바로 어머니의 공덕 덕분이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사르신 분이였기에 내가 봉암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어머니가 맺어준 인연으로 난 봉암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시험 끝나고 나를 봉암사에 데리고 갔었다.
그날 이후로 매년 4월 초파일이 되면 봉암사에 가고 있다.
결혼 이후에도 아이들까지 데리고 봉암사에 들리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봉암사에만 가면 왠지 마음이 편안하다.
머리가 아프고 힘들 때면 봉암사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통행이 제한되어 자주 갈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몇 해 전 어머니 영정을 봉암사에 모셨다.
돌아가실 때 봉암사 들려서 10만원 드리면서 당신이 죽은 사실을 알리라는 말씀을 남기고
떠나셨다.
그래서 49재를 봉암사에서 마쳤다.
어쩌다 한 번 봉암사에 들러 기도를 하다보면
어머님의 기도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직도 우리 아들 잘되게 해달라는 그 기도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