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없었다.
내가 찾고자 했던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있던 화전밭은 없었다.
내 어릴적 그 기억은 동화 속의 기억이었던가?
아니면 꿈속의 기억이었던가?
지금 내가 꿈꾸고 있는 것인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나는 머리를 끙끙거리며 고민하고 있다.
어릴적 그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건만 그 기억에 맞는 퍼즐을 도저히 맞출 수가 없었다.
사진 속 정면 가까이 보이는 소나무가 푸르게 우거진 낮은 봉우리와 우측 소나무 능선 사이에
"가는골"이 있었다.
왜 "가는골"이라고 불렀는지 그 연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영그렁 동네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불렀기에 나 또한 그렇게 불렀을 뿐이다.
그 "가는골"에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화전밭이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5살 되던 해에 돌아가시고 난 뒤 그 화전밭은 남은 가족의 몫이었다.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생업에 온 가족이 매달렸었다.
작은 일손이라고 예외가 없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굶지 않는 것이 행복이었던 시절이었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랬었다.
산속에 자그마한 평지만 있었도 그것을 밭으로 일구어 농사를 지어 먹던 시절
우리집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땅이 부족했던 시절 그 화전 밭은 우리집의 양식을 대 주는 옥토였다.
내 기억으로는 감자와 고구마를 심었던 것 같다.
자주색 토종 감자와 연노란 흰 감자, 그리고 고구마를 심었었다.
땅이 사질토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고구마는 분이 없는 물고구마가 많이 나왔었다.
분이 많은 방고구마를 좋았했었지만 방고구마를 먹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방고구마는 황토 땅에 지어야 하는데 그런 옥토는 감히 꿈꾸지 못하는 밭이었다.
그나마 이 화전밭 만으로 우리집에겐 큰 혜택이었다.
마을 동네 뒤에 있다고 해서 뒷밭이라 불렀는 데 그 길을 따라가노라니 옛 길의 흔적이 그대로이다.
다만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녀 길에 풀이 안 보일정도였는데 지금은 풀이 가득하다.
아마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드물어졌기 때문이리라.
옛 길 옆에 있던 감나무의 기억이 생생히 살아났다.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시간이 엄청 흘렀지만 아직까지 베어지지 않고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일까 오늘 찾고자 했던 화전밭을 찾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곳은 희끄머리라고 하는 곳이다.
밤나무 숲이 우거져서 아침 일찍 밤을 주우로 온 기억이 난다.
아침 안개가 가득한 날 초등학생인 내가 겁도 없이 이곳에 밤을 주우로 왔었다.
아침 일찍 가지 않으면 밤을 다른 사람들이 다 주워가기에 잠이 많던 어린시절인데도 불구하고
밤을 주워 뱃속에 가득 넣어가지고 왔었다.
밤을 담아올 비닐 봉지가 귀했던 시절이였기에 호주머니에 넣고 그래도 모자라면 윗옷 속으로 밤을
넣어 왔었다.
목 위의 옷을 벌려 밤을 넣으면 어느 듯 배는 점점 불러오고 배가 부를수록 기쁨은 더욱 배가되었던
기억들이 밤나무 숲을 지날 때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인가?
밤나무 숲을 지나자 길은 온데간데 없다.
나무가 꽉 우거지고 낙엽이 쌓여 길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길을 찾을 수가 없었고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던 흔적을 찾아 고민을 했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오늘도 허탕이런가?
수 년 전에 이 화전밭을 찾기 위해 시도했다가 숲이 우거져서 결국 되돌아갔었는데
오늘 또한 그럴 것 같았다.
내 기억 속의 화전밭 가는 길은 이랬다.
밤나무 숲을 지나 가면 산에서 물이 내려오는 작은 계곡이 있었고 산허리를 따라 넘어가면 또 하나의
물이 흐르는 발로 두폭 정도 되는 아주 작은 계곡이 있었다.
그 계곡에서 가재를 잡았던 기억이 난다.
두 번 째 계곡 옆 길을 따라 올라가면 화전밭이 있었다.
그러나 현장에 갔을 땐 도저히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림짐작으로 여기일 거라고 추측만 했을 뿐이다.
이렇게 먼 산길을 따라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작은 땅도 우리 집엔 엄청 소중했던 그 시절.
여기서 나온 고구마와 감자를 리어카가 들어오는 "희끄머리"까지 데레키로 지어날라었다.
수 십 번을 나르는 고통을 감내했던 그 시절의 기억도 이제는 40년이 훌쩍 넘었다.
도저히 찾지를 못하고 내려오는 길 허망함이 밀려왔다.
나무가 너무 우거져 흔적을 찾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이제 되돌아 내려오는 길
어릴적 목욕하던 "덤봉"이 궁금했다.
옛날에 이곳은 물이 꽤 깊었었다.
그래서 바위 위에서 담방구지(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를 했었다.
지금 찾아보니 그런 덤봉의 위세는 어디 가고 바닥이 메워져 목욕하기에도 너무 얕은 물이다.
이곳에 걸터앉아 놀던 그 때의 동네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물속에서 실컷 놀다가 바로 옆 과수원에서 서리를 했었는데 이제 그 친구들도 모두 50대에
머물고 있는데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사진을 보면 암벽에 작은 구멍이 보인다.
그 작은 구멍은 목욕을 난 후 내기를 하는 목표물이었다.
돌을 던져 구멍에 많이 넣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수 없는 돌을 던지며 놀았던 기억을 되살리며 돌을 던져보았다.
역시 잘 들어가지 않았다.
이 덕분으로 새재야구단 투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이제 내 유년시절 숲속에서 빠져나왔다.
빠져나오는 숲속의 입구는 동화속의 나라처럼 되어있었다.
하얗게 얼어 있는 얼음나라에서 옛날 썰매를 탔었던 기억을 마지막으로 꺼내보았다.
시린발을 녹이다 나이롱 양말을 쳐대먹고 혼났었던 기억
그 기억 속에서 빠져나왔다.
빠져나온 순간 나는 50대의 중늙은이로 되어 있는 자신을 본다.
이제는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남은 시간 동화처럼 살다 갈수 있을지 궁금하다.
남아 있는 시간이 많은 듯 하지만 뒤돌아보면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그 소중한 시간을 나는 다시 동화처럼 살고 싶다.
지금 얽매여 있는 사슬을 빨리 끊고 싶다.
그러나 내가 얽혀 있는 연줄과 탯줄을 자르기엔 아직도 이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줄을 끊는 날엔 나는 동화의 나라로 아니 숲속의 나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