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흔적들

고추 꿰매기(2004.12)

청화산 2006. 7. 5.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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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겨울 같지 않다.
옐리뇨 현상 때문에 따뜻한 겨울이 계속되고 있다.
겨울은 겨울다워야 하지만 그래도 따뜻한 것이 좋다.
집 떠나 온 사람으로서 겨울이 따뜻하다면 가슴이 덜 시리기 때문이다.

이제 1년 과정의 교육을 마무리 해가는 시점이다.
한해 마무리가 되는 시점에서 지난 1년은 나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집을 떠나 대구에서 생활하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매우 좋은 기회였다.
매일 한번씩 집에 있는 아이들과 통화를 해야 하루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때로 술 먹느라고 까먹은 적도 적지 않게 있었지만.......

얼마 전 함께 교육을 받았던 모임이 만들어져 나는 총무가 되었다.
단체용 통장을 개설하려고 하니 교육 때문에 시간이 잘 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마누라보고 통장을 개설해 달라고 집으로 전화를 했다.

수없이 하는 통화지만 늘 상의 말투.
“뭐 하나?”
“뭐하긴? 꼬추 꾸매여.”
아니 이게 웬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하고 깜짝 놀랐다.
누가 고추가 떨어졌나? 아니면 고추 푸대를 꿰맨다는 소린가?
“아니! 뭔 꼬추를 꾸맨다고?”
“부업으로 하는 것인데 한 개에 17원인데.”
그제야 마누라가 부업으로 고추를 꿰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집에 와서 보니 솜을 넣은 작고 빨간 고추를 꿰매는 일이였다.
가계 살림이 빠듯하니 혹 도움이 될까 싶어서 일을 시작한 것 같았다.

전에도 전자제품 코일 감는 것을 여러 달 한 적이 있었다.
평소에도 신찬은 몸.
부업을 하고 난 뒤 마누라의 앓는 소리는 더 커졌고 그 소리는 정말 듣기 싫었다.
가멸차지 못한 신랑 만나 마누라 고생시킨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을 수가 있겠는가?
마누라의 앓는 소리가 크면 클수록 나의 자격지심에 대한 초라함은 커져만 가는 느낌.
남자로서 느끼는 서글픈 비애였다.
그래서 부업을 하지마라고 이야기 했고 마누라는 부업을 그만 둔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신랑이 교육을 받느라고 대구 가 있고 간섭할 사람이 없으니 오죽 좋겠는가?
“아니! 내가 하지마라고 그랬는데 또 한다고? 어이구 참 내! 하루에 몇 개하는데?”
“틈틈이 열심히 하면 하루에 100개정도 하는데”
“그래 하루 종일 해서 1700원이면 30일 해도 5만1000원 밖에 안 되는데 그거 뭐 할라고 해여? 애만 먹지."
“그래도.......”
마누라는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꼬추를 실컷 만지니 힘은 안 들겠네.”
그 소리에 마누라는 깔깔 웃었다.

전화를 끊고 난 뒤 한참 동안 생각을 해 보았다.
결혼한 지 11년이 되었다.
작은 아파트에 들어와서 아이가 셋으로 늘어났다.
내가 부지런히 돈을 벌어 온 것 같았는데 돈은 어디로 갔는지 아직도 이사할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애들한테 다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다.
11년이란 세월에 TV도 낡아서 여러 번 수리를 받았다.
혹 남의 집에서 큰 TV를 보다가 우리 집 TV를 볼 때면 왜 그리 작아 보이고 답답해 보이는지.
TV만 그런가.
세탁기도 힘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고.
게다가 혼수품으로 해 온 장롱문은 한 쪽이 떨어져서 속 내용물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창피한 생각이 들어 장롱 안을 흰 천으로 좀 가리라고 했지만 마누라는 가구점에 이야기했는데 안 온다고 핑계를 돌렸다.

전만해도 우리 집이 작든 말든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장롱문이 떨어지니 이제는 창피한 느낌이 든다.
전에는 술만 먹으면 우리 집으로 술친구들을 끌어들였는데 지금은 용기가 나지 않는다.
확실히 살림이 궁하니 힘이 떨어지는 것 같다.

마누라는 고추를 꿰매서 돈을 버는데 돈을 축내는 고추가 셋이다.
큰 놈은 술에 절여 돈을 축내고 아들 둘은 군것질로 돈을 축낸다.
그래도 고추 꿰매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다.

고추를 많이 꿰맬 때마다 재산이 쑥쑥 불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고추 값이 떨어지면 안 될 것 같다.
고추 값이 한 개에 20원으로 올랐다고 하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다.

아무래도 마누라는 고추를 더 열심히 꿰매야 할 것 같다.
그래야지 하루 빨리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으니.
“여보 마누라! 아파도 괜찮으니 열심히 고추를 꿰매주세요.
나도 한 번 좋은 집에서 살아봐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