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흔적들

장군

청화산 2010. 12. 25. 19:19

 

장군(2010.12.25)

살면서 아버지가 장군으로 보인 적이 있을까?
나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
아버지는 내가 5살 때 일찍 하늘나라로 가셨기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단지 희미한 기억 속에서 생각나는 것은 아버지 수염 때문에 입맞춤을 하기 싫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또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날과 돌아가신 날 기억은 너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더 이상 살 가망성이 없다하여 대구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신 날
살을 에는 섣달 바람 소리는 우리 집의 슬픔을 함께 하는 듯 했다.
어머니는 1달 보름 된 막내 동생을 안고 하염없이 우셨다.
난 그런 슬픔을 멀리한 채 병원에서 가지고 온 황도 통조림 먹기에 급급했다.
슬픔을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참 내가 너무 했구나 하는 생각이 가끔씩 머리를

쳐들곤 한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때의 기억이 전부인 나로서 자세한 사항은 돌아가신 어머니와 누님들한테 들어

알고 있다.
상여 떠나는 날 세상은 모든 것을 덮어버릴 양 많은 눈이 내려 결국은 장례를 옳게

치루지 못하고 가매장 했다고 했다.
그리고 날씨가 풀려 봄에 다시 묘를 안장했다고 들었다.

 

그날 이후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어도 돌아가셨기에 어머니를 아버지처럼 여기며 자랐다.
사람들은 모두가 어머니를 여장부라고 이야기 했다.
그것은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뒤 여자이면서도 8남매를 억척같이 생활하면서 모두

잘 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내 가슴속에 항상 여장부로, 여장군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제 지천명을 향해가고 있는 나는 세월에 떠밀려 한 가정의 아버지로 자리하고

있다.
세월이 밀어주는 힘 때문에 아버지로 자리 잡았지만 그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이제껏 돌아본 적이 없다.
내 아버지의 수염 기억은 자상한 아버지로서의 기억되고 있는데 나는 어떤가?
자식들에게 자상한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가?
답을 매기지 못했다.
엄격하지만 나름대로 잘하고 있다는 자평을 했지만 그것은 나만의 생각이었다.

 

며칠 전 집에 돌아온 나는 마누라의 잔소리 때문에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둘째 녀석이 문창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니 입학금이 많이 들어가는 지 영수증을

내밀면서 나보고 살아보라고 했다.
안 그래도 기분이 가라앉아 있던 차 돈 없다고 하는 사람이 둘째 녀석 휴대폰

사 준 것을 가지고 화를 냈다.
“아니! 이 사람아! 돈 없는 사람이 휴대폰 사줄 돈은 어디 있나?”
그렇게 내가 큰소리치는 것을 둘째 녀석은 모두 듣고 있었다.
그러나 난 괘의치 않았다.
하지만 화가 풀리고 난 뒤 반성을 많이 했다.
요즘 모든 애들이 다 가지고 있는 휴대폰이지만 둘째와 셋째 녀석은 없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가면 해주기로 약속을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해줄 줄은 몰랐다.
아무리 배치고사 시험에서 특반에 들어 30만원 장학금을 받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나한테 물어보고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모임이 있어 술을 한잔하고 있는데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장군! 언능 들어오시오. 엄마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답장을 주었다.
“좀 이따 간다. 엄마 괜찮나?”
그러자 다시 메시지가 왔다.
“예 괜찮아요. 언능 들어오시오.”
마누라한테 술 먹는데 전화를 하지 마라했더니 아들 시켜 독촉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날 마누라가 나에게 말했다.
“당신 원종이가 휴대폰에 장군이라 저장해놓았던데 뭐 땜에 그런지 알고 있나?”
난 그냥 아버지가 목소리가 크니 “장군”이라 저장했겠지 그래 생각 했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마누라가 다시 이야기 했다.
원종이한테 왜 아버지를 “장군”이라 저장했냐고 물었다고 했다.
그러자 원종이가 하는 말을 듣고 놀랐다고 말했다.
다름 아닌 “독불장군(獨不將軍)”
앞에 두자를 빼고 이름을 지은 것이라 했다.

그 말을 듣고 난 충격에 빠졌다.

잠시 동안 멍해졌다.
장군이란 호칭은 아버지의 위대함 때문에 지은 것이 아니었다.
일상에서 아버지를 보고 느낀 것을 가지고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
당당하고, 절도 있고 배울 점이 많아 장군이라 지었겠지 생각했던 나
그것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아버지로서 내 모습은 독단적인 독불장군으로 비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난 화가 나지 않았다.
‘아하 내가 이렇게 독불장군처럼 비쳐지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독불장군처럼 느껴지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내 자신을 뒤돌아보았다.
“이렇게 해. 그래 하지 마. 똑바로 해. 그것도 못하나”
나만의 방식으로 애들 의견에 아랑곳없이 대했던 것이다.
그것이 독불장군처럼 비춰진 것이다.

 

사람의 바탕, 성격은 잘 바뀌지 않는다.
천성이 그렇다면 더더욱 바꾸기가 힘들다.
아마도 내가 그런 식으로 자식들에게 해 왔다면 아마 알게 모르게

내 자식들에게도 내가 했던 행동거지가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내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당당함과 꼿꼿함으로 사는 것처럼.......

세월이 흐르면 그것이 자연스레 나타날 것이다.

나의 자식들이 아버지로 되어 있을 때
내 자식들이 나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바로 나의 잘못이다.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입맞춤 하는 자상한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는데
어머니는 당당함과 꼿꼿함으로 여장부, 여장군으로 기억되고 있는데
나는 내 아들에게 독불장군의 아버지로 기억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잘 고쳐지지 않는 것이 성격인데 걱정이 많이 된다.
어떻게 하면 점수를 많이 따는 자상한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술 먹고 들어오면 자상한 아버지가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맨 날 술 먹고 들어올 수도 없으니........
참 어렵다.
아버지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그러나 되던 안 되던 노력을 해볼 것이다.
앞으로 환골탈퇴(換骨奪胎) 할 수 있도록 “독불장군”에서 진짜 “장군”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러면서 자식들에게 당부해본다.
아버지가 아무리 독불장군이었다 하더라도
아버지 마음은 항상 너희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표현 못하고 서툰 것이 죄일 뿐
너희들의 일거수일투족 모두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알았으면 한다.
너희들이 슬프면 아버지는 더 슬프고
너희들이 아프면 아버지는 더 아프다.
다만 아버지로서 너희에게 약한 모습 보여주기 싫기 때문에 당당함으로 포장한

것일 뿐이다.
아버지의 겉모습이 그럴 뿐
속마음은 천사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 알아주었으면 한다.
단지 아버지는 무게감 때문에 너희들 앞에서
눈물 흘릴 수도 없고
힘들어하는 표정도 지을 수 없고
그래서 일부러 당당함 때문에 독단적으로 흘렀다는 것 인정해 주길 바란다.

 

아버지도 사람이다.
슬프면 울고 싶은 사람이다.
너희들이 아프면 더 아픈 사람이다.
아버지로서 자격이 부족하다 싶을 때 술 먹고 혼자 우는 사람이다.

아버지가 화를 내고 하는 것에
조그마한 어떤 감정도 없다.
너희들을 위한 것이니 이해해주길 바란다.
너희들을 위한 사랑은 절대불변이다.
아버지는 세월이 흘러 내 마음을 알아줄 때가 오기를 다만 기다릴 뿐이다.
네 할머니가 가르쳐 준 그것 때문에 아버지가 오늘을 꿋꿋이 사는 것처럼

너희들도 언제가 그때가 오리라 믿는다.

 

글 마무리 하고 있는 중간에 둘째 녀석한테 메시지가 날아들었었다.
“장군님 감사합니당 ㅋㅋ 진짜로요”
늦는다고 하는 전화에 허락 해주었다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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