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흔적들

가는골 가는길(05.09.11)

청화산 2006. 7. 5. 16:52

 

뭣 때문이었을까?
나이가 먹어가는 이유 때문일까?
불현듯 어릴 적 내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흔적을 찾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계절이 가을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 산들은 버섯으로 나를 유혹했다.
이맘때가 되면 매년 가는 산이지만 올해는 내 기억 속에 가는골을 가고 싶었다.

 

얼마나 바뀌었을까 흔적을 찾아보기로 하고 산행의 길을 내가 태어나고 자란 뒷밭을 따라 희끄머리,

가는골, 비쩍골로 정했다.

영그렁 용수네 밭 부근 묘터에 차를 세워두고 밭을 가로질러 개울로 갔다.
옛날에는 이 도랑에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이었는데 물이 말라 있었다.
계곡은 그대로인데 가뭄철이 아닌데도 물이 말라 있었다.

세월은 개울 바닥을 물살에 두껍게 쌓아 올렸고 물은 바닥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얕게 흐르고 있는 개울을 자세히 들여다봐도 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어릴 적 가뭄 때가 되면 이 도랑을 따라 고기를 잡아 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기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개울 옆 밤나무들은 나이는 먹었지만 여전히 건재하고 있었다.
가을이 익어가면서 밤나무는 알밤을 토해낼 듯 기세를 보이고 있다.
아침 이슬 머금은 나뭇잎들은 이제 막 물감을 섞으려는 듯 하다.

개울을 가로질러 영그렁 재용이네 집이 있던 자리의 밭을 자나려 하니 무성히 자란 콩밭이 길을 막는다.
할 수 없이 개울을 따라 가기로 산행 길을 바꿨다.
마른 개울을 따라 가다보니 물이 흐른다.

금강산을 작년에 다녀왔는데 그에 못지않게 깨끗한 물이다.
약간 깊은 웅덩이를 들여다보니 고기의 흔적은 역시 보이지 않았다.

50m만 더 가면 어릴 적 멱을 감던 덤붕이 나온다.
어떻게 변했을까 걸음을 옮길 때마다 궁금증은 부풀어 올랐다.

덤붕에 섰다.
역시 세월의 물살은 덤붕을 바꿔 놓았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서 담방구질을 하던 곳으로 물이 깊었는데 지금은 무릎 깊이의 웅덩이로

변해 있었다.

 

동네 아이들과 소리치며 물장구치며 놀던 어린 시절의 잃어버린 시간이 스쳐간다.
물속에 하얀 돌을 던져놓고 먼저 찾기를 한다.
물속으로 누가 더 많이 가는지 내기를 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눈은 새빨갛게 충혈 되고 했었다.

 

우리가 이 덤붕을 찾을 때면 근처에 있는 과수원에는 복숭아, 옹애(자두)가 익어가고 있었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던 시절
물놀이를 하고 나면 배가 고프고 먹을 것이 생각난다.
약속이나 한 듯 과수원에 가서 서리를 하기로 하고 접근을 한다.
그러나 주인은 자리 뜨지 않고 지키고 있다.
간신히 허점을 파고들어 따 온 복숭아를 먹을 때 그 꿀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덤붕을 지나 가는골로 가는 산 입구에 사람의 흔적이 있다.
벌초 때문인지 풀을 베어 놓아 사람이 다니도록 길을 뚫어 놓았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마을 인근에 이렇게 수풀이 우거지도록 그냥 두지 않았다.
나무를 땔감으로 했기에 마을 어귀 산, 하천 주변에는 나무가 남아 있지 않았다.

벌초를 한 듯 산은 매끈했었다.
다행히 생소나무를 베면 잡혀간다는 말 때문에 소나무 옆가지 청소갑을 베고 나머지는 그냥 두었었다.
소나무 밑 떨어진 낙엽을 갈비라고 했다.
갈비는 훌륭한 불쏘시개였는데 이것을 구하기도 어려웠었다.
그때 동네 어른들은 이 갈비를 나뭇단처럼 묶어 지게로 지고 왔었다.
어떻게 그렇게 묶을 수 있었는지 어린 나에게는 대단한 기술로 보였고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궁금하다.

 

그 당시 나는 초등학교 2학년 그때부터 나무를 했다.
형이 4학년 어머니는 다른 동네 아저씨께 부탁을 해서 형가 내가 질 지게를 맞추어 주었었다.
형하고 내가 낫으로 나무를 할 때 3아름이면 한 짐이 되었다.
작은 나무들을 모아서 한 짐을 지고와도 땔감으로 하기에는 양이 적었고 화력도 약했다.

그러나 동네 어른들이 하는 나뭇짐은 나무가 키도 컸고 화력이 좋은 물거리를 했었다.

그러다보니 우리 집은 항상 땔나무가 부족하였고 1년내 나무를 하다시피 했다.

집집마다 한 해 동안 땔나무를 쌓아둔다.
우리 집도 쌓아두기는 했지만 턱없이 작은 량이다.
하지만 땔감은 쉬이 떨어지고 해서 여름에도 산에 가서 잡나무를 베어서 말리고 그것을 땔감으로

사용했었다.
때로 들로 나가서 썩은 나무가지가 있을 때 항상 주워가지고 와서 땔감으로 사용하였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우거진 수풀로 앞을 나아가기가 힘들었다.
내가 어릴 적 다녔던 길을 찾아야 하는데 수풀이 우거져서 위치 파악도 잘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벌초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앞만 보인다면 옛날의 모습을 찾을 수가 있을텐데 우거진 수풀로 찾을 수가 없었다.
아쉬움이 밀려왔다.

 

옛날 이곳 가는골에 아버지가 개간해 놓으신 개간 밭이 있었다.
이 밭에는 감자를 심었었다.
토질은 마사토라서 감자는 잘 자랐다.

감자를 다 캐고 나면 감자를 실어 날라야 하는데 형이 지는 지게로는 나르기가 마땅찮았다.
그래서 데레키에 감자를 담고 데레키 끈을 이마에 메고 리어카가 들어오는 길목까지 날라야 했다.
감자가 많이 나오는 것도 좋지만 나르기가 만만찮았다.
작은 비탈 산길을 따라 가는 것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복하면서 감자 나르기를 수없이 하다보면 몸은 지치고 배도 고팠다.
한 잎 베어 문 감자는 에리기만 했다.
지금은 구하기 힘든 토종 자지감자(보라색)는 더욱 에렸다.
그래도 잠시나마 배고픔을 잊게 해 주었던 감자였고 우리 집의 소중한 일상의 양식이었다.
감자 썰어 넣고, 호박잎 뜯어 놓고 장물(간장)로 간 맞춘 감자 국을 먹으면서 세월을 그렇게 지나왔었다.

 

길을 따라 왔건만 수목이 우거져 도저히 밭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없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아버지의 땀이 어린 개간 밭
오늘은 꼭 이 밭을 보고 싶었는데.......
그 밭을 볼 수 없음에 힘이 빠진다.

산을 오르기가 싫다.
억지로의 발걸음을 옮겼지만 여느 때보다 힘이 들었다.

결국은 버섯 따는 것을 포기하고 산꾼들이 만들어 놓은 흔적을 따라 산을 내려왔다.

멀리서 다시 한번 가는골을 바라보았다.
바로 저긴데.........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밭인데..........

차에 몸을 얹히며 가는골을 다시 돌아보았다.
까만 얼굴에 땀방울 맺힌 얼굴로 일하는 모습이 소리 없이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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