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흔적들

콘돔 이야기

청화산 2010. 1. 18. 17:56

 

 추억1 - 콘돔(2010. 1. 18)

며칠 전 언론에서 3자녀 이상 가구는 자동차 취·등록세를 면제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내가 타고 다니는 차는 액센트 1,500cc이다.
98년 12월에 샀으니 만 11년이 넘어 12년째 타고 있는 셈이다.
750만원에 주고 샀는데 애들 셋 태워가면서 큰 불편한 점 없이 잘 타고 다닌 보물 같은

차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지라 하나 둘 식 부품을 갈아주어야 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차 살 여유가 없는지라 좀 더 타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런 기사를 보니

차를 사고 싶어진다.

 

그러고 보니 참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그 전에는 인구가 많다하여 산아제한 정책을 펴더니만 이제는 출산 장려 정책을 써야 할

정도로 출산율이 낮아졌다.
OECD 30개 국가 중에서 2009년 기준 우리나라 출산율은 최하위 1.13으로 평균치

1.65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
미국은 소득수준이 우리보다 훨씬 높은 선진국인데도 출산율이 1위로 2.10명이다.
사람이 자원인데 우리나라 현실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깝다.


그래도 나는 3명을 낳았으니 국가정책에 이바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마누라가 자궁 외 임신이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넷째를 낳았을 그런 사람이다.
내가 8남매의 7째로 태어나다보니 자식 많은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내 기억을 더듬어 올라간다.
나는 가족계획이 시작되던 60년대에 태어났다.
아무래도 60년대에는 어려서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70년대 이후로는 언뜻언뜻 스치는

기억들이 생각난다.
 
내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다닐 때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집에 낯선 물건이 있었다.
무엇인가 궁금하여 뜯어보았다.
‘이게 뭐지? 그 참 희한하게 생겼네. 고무풍선인가?’
하얀색인데 고무로 돌돌 말려 있었고 가운데가 젖꼭지처럼 뾰족하게 되어 있었다.
손으로 말린 것을 푸니 길이가 상당히 길었다.
새롭게 만든 고무풍선 같았다.
‘야아 이거! 고무풍선 정말 좋다.  야아 이런 것도 있네. 함 불어봐야 겠다’
그래서 곽에 있는 나머지 풍선을 가지고 나와 마루에 앉아 시험 삼아 불어보았다.
야아! 그런데 이게 장난이 아니다.
보통 풍선 같았으면 어느 정도 불면 펑 터져버리는데 이건 엄청 불어도 터지지 않았다.
신축력이 환상적이라 기분이 엄청 좋았다.
돈도 궁하던 시절 이런 풍선이 집에 넉넉히 있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신기한 것이 있으면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지는 법
한 동네 있는 친구들에게도 나눠주고 서로 크게 부는 내기를 했다.
6명 정도 모여서 풍선을 크게 불어놓으니 좁은 마당에 하늘 가득 풍선이 가득한 것

같았다.
그렇게 서로 웃으면서 하늘로 풍선을 퉁기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놀았다.
그러다 한참 놀고 있는데 동네 아줌마들이 우리가 노는 것을 보고 우리 집으로 왔다.
어디서 났냐고 묻길래 우리 집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놀던 아이들을 불러 놓고 이것을 가지고 놀면 절대 안 된다고 혼을 내었다.
풍선이 아니라고 했다.
어른들이 사용하는 것이니 애들은 가지고 놀면 안 된다고 했다.
‘아니! 왜? 어른들이 가지고 노는 풍선이 따로 있는가? 왜 어른들은 쓰면서 우리들은

가지고 놀면 왜 안 된다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오신 어머니
낮에 있었던 일을 마을 사람들에게 들었나보다.
왜 물어보지도 않고 물건을 뜯어가지고 온 동네 소문나도록 놀았냐고 혼났다.
‘고무풍선 가지고 논게 뭐 그리 잘못인가’
어머니도 그게 어디에 써는 것인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결국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시간이 흘러 세상의 물정을 알 때
내 기억 속에 숨어 있던 하얀 고무풍선 기억이 살아났다.
그것은 바로 콘돔이었던 것이다.
옛날 어른들은 성의식에 대해 굉장히 보수적이었으므로 나를 어디서 낳았냐고 물으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그러고 또 배꼽으로 낳았다고 했었다.
그런 시절이었으니 남자들이 피임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해주는 것은

무척 어려웠으리라.
우린 그것도 모르고 콘돔을 가지고 고무풍선이라고 좋아하며 놀았으니.

 

어머니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8남매를 보따리 장사(행상)를 하시면서 키우셨다.
어머니는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다 보니 활동 영역이 넓었다.
그런 까닭인지 어머니는 대한가족협회에서 위촉하는 마을 단위 부녀회의 책임자였다.

부녀회 책임자로 위촉되어 있으니 가족계획 계몽을 해야 했으며 그 일환으로 집집마다

콘돔을 나눠주는 일을 하셨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에 콘돔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족계획이 언제부터 시작 되었는가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1960년대의 가족계획은 1961년 대한가족협회가 발족됨으로써 본격적인 산아제한정책이

시작되었다.
1960년대 산아제한 표어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덮어 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였다.
그러다 1970년대 들어서는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로 바뀌었고,

그래도 인구가 증가하자 1980년대에는 “둘도 많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란 표어가 만들어졌다.
그러다 1990년대에는 국민 소득증가와 도시화에 따른 핵가족 문제 등 사회적인 문제점이

많이 나타났고 특히 출산율이 감소함에 따라 출산장려정책이 펼쳐져 “젊은 꿈은

아름답게, 이성교재는 건전하게”란 표어가 생겨났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산아제한 정책 대신에 출산장려 정책으로 바뀌었고 출산장려

정책의 일환으로 “자녀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형제입니다.”라는 표어로 다 출산

권장을 유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인 지금 출산장려금, 보육료 지원, 세금감면, 전기료 감면 등

각종 혜택을 많이 주지만 출산율은 점점 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소득 수준은 높아졌지만 삶의 질은 나아진 게 없다보니 경제적 사정 때문에 결혼 적령기가

늦어지고 또 키우는 어려움, 교육 등 많은 부담 때문에 많이 낳기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난 행복하다.
4명을 채우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3명을 낳아준 마누라가 고맙다.
미래를 예견한 듯한 다자녀 가구가 되었기에 어딜 가도 자랑을 한다.
나처럼 적어도 3명은 낳아야 된다고 하면서

우리나라가 강대국이 되려면 최소한 인구가 1억 명은 되어야 한다.
사람이 자원인 세상, 중국이 대국이 되는 것은 풍부한 인적자원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 후손들은 출산율을 많이 높여 우수한 인적자원으로 강대국이 될 수 있도록

출산에 대한 인식이 바뀌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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