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흔적들

맏이

청화산 2014. 2. 18. 22:00

 

8남매의 일곱 번째로 태어난 나는 맏이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인생을 살만큼 살았기에 주위의 맏이 분들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다.
맏이는 자기의 욕심을 버리고 헌신을 해야 대부분 집안이 평온하다.
그러나 맏이가 이 역할을 어기고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재산을 가로채려한다면 그 집안은 십중팔구

싸움이 빈번한 집안이 되는 것을 보아왔다.
이토록 맏이의 역할에 따라 집안의 화목이 좌우되었기에 맏이는 가정의 중심에 있었다.
맏이는 부모의 뜻을 이어가면서 동생들을 뒷바라지 하는 의무가 주어졌기에 그 의무를 충실히 하느냐에

따라 맏이의 평가는 달라졌었다.
하지만 세월은 맏이의 문화를 많이 바꿔놓았다.
형제자매가 많은 가족의 경우 맏이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보통 두 명이 대다수이니 2명이 환경에서 맏이

문화를 찾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래도 3명이라면 맏이 문화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삼남매인데 딸, 아들, 아들을 두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의식이 팽배하던 시절 그래도 나는 세 명을 낳았다.
의료보험 적용도 안 되고, 가족수당도 주지 않았던 그런 시절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의료보험, 가족수당은 기본이고 출산장려금까지 주고 있다.
세상 정말 오래 살아보고 많이 놓고 볼 일이다.

며칠 전 일이다.
새벽부터 부엌에서 떨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녘 깨어있었던 나는 밖에서 나는 소리가 맏이인 딸내미가 내는 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마누라는 내 옆에 코를 골며 자고 있었기에........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였는데 마누라도 떨그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니 지연이 뭐하는 거라? 새벽부터?”
“지 남자 친구 면회 가는데 음식 준비해서 간다고 저러는 거라.”
시간을 보니 5시 정도 되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얼마나 남자 친구를 좋아하기에 새벽부터 저렇게 공을 들여 음식을 만들고 하는 것인지.
한편으로 말로 표현하기 힘든 허망한 감정이 올라왔다.
‘엄마 아빠를 위해서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아침에 일어나니 이미 딸내미는 짐을 싸서 남자친구 면회를 가고 없었다.
어지러운 부엌 싱크대를 보니 반찬을 골고루 한 것 같았다.
계란말이 흔적도 보이고, 여러 가지 반찬을 만들어 간 듯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새벽녘 감춰두었던 감정까지 더 올라왔다.
‘그래! 자식 키워봤자 소용없어. 남자 생기면 끝이야’
감정을 추스르고 난 뒤 저 엄마 생일에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기로 했다.
생일날 아침이 되었다.
꿈쩍도 안 할 것 같은 맏이가 새벽녘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엄마 생일이라고 미역국도 끓이고 밥도 하는 것이다.
전날 저 엄마가 배탈 나 잘 먹지도 못했던 것을 보았던지 죽까지 끓이는 것이었다.

 

그제야 앙금 맺혔던 내 마음이 풀렸다.
‘남자 친구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저 엄마를 많이 생각하고 있구나.’
남자 동생 둘이는 저 엄마 생일과 관계없이 쿨쿨 자고 있는데 새벽에 일어나 생일상을 마련해주는

딸내미를 보면서 나는 반성을 많이 하였다.
‘역시 우리 집의 맏이가 최고구나.’
옹졸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누가 굳이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저렇게 하는 모습에서 훌륭한 맏이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는 든든한 아군처럼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맏이가 되었지만 남자 못지않은 그런 맏이가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대통령도 여자가 되는 마당에 맏이가 여자면 어떤가?
엄마 아버지가 못하는 부분을 맏이인 딸내미가 채워줬으면 한다.
때로 동생들이 말을 안 들어 힘들지도 모르겠지.
그래도 잘 참고 견디면 아마도 동생들도 네 뜻을 받들어 많이 도와줄 것으로 믿는다.
가끔씩 딸내미를 볼 때 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분신처럼 느낄 때가 있다.
저 할머니를 닮았다면 나 역시 맏이에게 의지해도 큰 문제가 없을 듯하다.
악착같은 생을 사시다 가신지 벌써 6년이 넘어 기억이 가물거린다.
할머니 성품을 닮은 맏이라면 이런 세상은 너끈히 헤쳐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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