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집을 들렀다.
마루 내실에 메주가 덩그러니 걸려 있다.
메주를 한다고 했으면 내가 거들어 주었을 텐데 아무런 말도 없이 어머니 혼자서
불편한 몸으로 메주를 많이도 만들었다.
색깔 고운 모습을 보니 장맛이 좋을 듯 했다.
어릴 적 메주 하던 날이 생각난다.
메주를 하기 수일 전부터 콩을 고르기 시작한다.
옛날에는 콩 타작을 도리깨로 했다.
바싹 마른 콩을 모아 놓고 도리깨를 때리면 수많은 콩들이 갇혔던 몸을 용수철처럼
튀어나오듯 마당 멀리로 흩어졌었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많이 흩어졌기에 콩알 줍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콩을 쓸어 모아 팔랑개비에 찌꺼기를 날려 보내고 누렇게 익은 콩들을 가마니에 담아 두었다.
메주 할 시기가 가까워지자 가족들 전체가 바빠진다.
돌 고르는 기계가 없던 시절 일일이 섞인 돌, 깍지들을 골라야 했다.
시간이 흘러 쏟아지는 잠의 깊이가 더해질수록 콩 고르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던 시간
그것은 맛 좋은 된장을 위한 고달픈 시간이었다.
메주를 하는 날
어느 집 한집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에 몇 집이 함께 서로 일을 하면서 서로 도와주면서 했다.
큰 가마솥에 물을 붓고 콩이 잘 익도록 장작불에 푹 삶았다.
메주 하는 날이라 학교에서 일찍 집에 돌아와 보니 아직도 콩을 삶고 있었다.
여러 집이 함께하다보니 늦어진 것 같았다.
가마솥을 보았다.
아궁이의 바알간 빛이 더해질수록 가마솥은 김을 쏟으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하얀 김이 새어나오면서 콩 익는 냄새에 취해 아궁이 불빛을 보고 있노라면 볼도
마음도 발갛게 익어 갔었다.
시간이 흘러 솥뚜껑을 열었을 때 하얀 김들이 집안에 가득하고 삶은 콩 냄새에 취해
있을때 어머니는 김이 사라진 익은 콩들을 한 그릇 푹 떠서 옆에 있는 우리에게 떠 주었다.
먹는 것이 부족했던 시절
메주콩은 맛 나는 먹거리였다.
그러나 좋은 음식도 과하면 좋지 않은 법
너무 많은 콩을 먹어 다음날 설사를 했었다.
어둠이 드리워져 깜깜해지는 시간
메주콩을 넣고 빻은 후 틀에 넣고 찍어냈다.
너무 곱게 빻아도 아니 되기 때문에 적당하게 빻은 후 만든 메주를 짚이나 새끼줄로 묶고
잘 마르도록 살강에 걸어 놓았다.
시간이 흘러 메주가 말라감에 따라 메주 곳곳은 움푹 패기 시작했다.
균열이 간 메주에서 마른 콩을 조금씩 떼어 먹기 시작하자 보기 좋았던 메주의 첫 모양은
오간데 없어졌다.
메주 떼어먹는다고 혼도 났지만 궁할 때 입을 즐겁게 해준 메주였다.
메주가 충분히 마르면 메주를 쌓아 놓고 덮은 후 방안을 따뜻하게 하여 메주를 띄우기 시작한다.
메주를 띄울 때 나는 냄새는 고약하다.
푹 떤 냄새가 방안에 가득할 때도 묵묵히 기다려야 했다.
좋은 된장, 간장을 얻기 위한 인내의 시간
그런 시간이 지나야 냄새나는 메주는 맛있는 된장이나 간장으로 탈바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을 만들 때도 날을 잡아서 했다.
장맛이 좋게 하기 위해 정월이나 이월의 말(馬)일에 장을 담갔다.
그러한 정성으로 만들어진 장이 밥상에 오를 땐 된장찌개, 된장국, 날된장이 되어 가난한
일상의 주 반찬이 되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아무리 좋은 음식이 있어도 입에 밴 된장의 맛은 잊을 수 없다.
혹 집을 비워 출장을 갔을 때 된장을 며칠 먹지 않으면 음식을 먹어도 시원찮았다.
어머니가 만든 장은 동네에서도 소문이 나 있어 동네 어른들이 자주 얻으러 왔었다.
결혼하고 외지에 나가 있는 형님, 누나들도 아직까지 어머니가 만든 장맛에 취해 있어 매년
된장을 가지러 온다.
어머니는 직접 만든 장을 나눠주시면서 자식들이 된장 맛있다고 하는 소리에 너무도 좋아
하신다.
그러면서 나는 은근히 마누라를 나무란다.
“야아 이 사람아! 어머니 장 담그는 것 가르쳐 달라고 해. 어머니 사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좀 배워라.”
그런데 희안하다.
어머니는 며느리가 장 담그는 것 가르쳐 달라고 하는데도 대답은 해놓고 잘 가르쳐 주지 않았다.
거리도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건만 며느리를 부르지 않았다.
어머니 집에 들르면 벌써 혼자 장을 다 담궈 놓으신 후였다.
어머니 장맛이 최고라는 자식들의 칭찬 소리를 며느리가 차지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팔순을 앞두고 계신 어머니
이제 며느리에게 된장 담그는 법을 가르쳐 줄만도 한데 아직까지 변함이 없으시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머니 장맛에 젖어 있는 조급해지는 아들, 손녀, 손자 마음을 모르고 계신다.
이렇게 된장은 우리의 가난한 삶이나 풍족한 삶이나 항상 가까이 있던 먹거리이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된장을 먹지 않는 아이들이 엄청 많이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나는 자식 복이 있어 그런지 반찬 걱정은 들었다.
된장 넣고 푹 끓인 시래기, 된장찌개, 청국장, 상추 배추쌈에 된장 못 먹는 것이 없다.
옛날 조상의 손맛도 모르고 옛 맛을 잃어가는 세대인데 우리 집 애들은 된장 맛을 잘 안다.
바람이 있다면 아무리 먹어도 싫증나지 않는 잘 묵은 된장 맛 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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